“우리에게 모든 현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그 세계는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로 머물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움직이는 대기가 보일 것이며, 소리가 발생하는 곳으로부터 공기의 압력은 계속 변화하며 이동하고 있을 것이다. 생명체의 체온이 변화하는 것을 볼지도, 어쩌면 이미 공간을 가득 채워버린 전자기파들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일지 모른다. 이러한 격동적인 움직임들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결국 복잡함 넘어의 반복적인 요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들을 시청각적 심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그것은 모든 현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상상하며 만드는 것이다.”(그레이코드, 지인)
전자음악 작곡가이자 사운드-미디어 아티스트 그룹으로도 활동하는 그레이코드, 지인은 백남준 특별전 《트랜스미션: 너에게 닿기를》이 전시 중인 제2전시실에 또 하나의 전시 《WIWR: 약하게 상호작용하는 약하게 반향하는》(11.7-12.3)을 열어 응답한다. 제목이 지시하듯 ‘상호작용’에 주목한 소리 설치는 전시 공간에 놓인 여러 개의 스피커가 하나의 공통된 시스템을 공유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잔향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백남준의 비디오에서부터 현장 소음까지 뒤섞인 전시 공간의 파동, 즉 공간에서 전파되는 진동이라는 변수에 주목해 “약하게 상호작용하고 약하게 반향하는” 계(系, system)를 모델링한다. 12월 2일, 전시의 클로징 이벤트로 예정된 라이브 퍼포먼스는 서로 다른 속도를 갖는 빛과 소리의 반향을 시청각적으로 극대화하며 관객과 만난다.
작가소개
그레이코드, 지인은 전자음악 작곡가이자 아티스트 듀오이다. 공기의 진동, 소리의 음압 그리고 음악적 긴장과 이완을 작품의 언어로 활용하여 비가시적이지만 실재하는 현상을 소리로 분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을 만든다. 이들의 작업에서 주요한 재료인 스피커와 하드웨어 시스템은 악기로 기능하며 물리적 공간의 요소들과 공명한다. 작업을 매개로 감지되는 파장과 출렁임, 잔향은 청각뿐 아니라 시각, 몸의 경험에 관여하며 듣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보도록 자극한다. 2021년 개인전 《데이터 컴포지션》으로 출판한 서적은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최하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2018년 독일 카를스루에 예술과 미디어 센터(ZKM) 헤르츠랩과 남서독일방송국(SWR) 주최 ‘기가-헤르츠 어워드’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일본 야마구치 정보예술센터(YCAM) 인터랩, 체코 런치밋 페스티벌, 2019년 베를린 한국문화원, 2020년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등 국내외에서 전시와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3.0》
‘랜덤 액세스’라는 프로젝트의 명칭은 백남준이 자신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1963)에서 선보였던 동명의 작품에서 비롯하였다. 〈랜덤 액세스〉는 마그네틱 오디오테이프를 릴케이스 밖으로 꺼내 벽에 임의로 붙이고, 관객이 마그네틱 재생헤드로 자유롭게 테이프를 긁어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백남준아트센터는 2010년부터 2020년까지 〈랜덤 액세스〉에서 찾을 수 있는 즉흥성, 비결정성, 상호작용, 참여 등을 키워드 삼아 백남준의 예술을 동시대 작가들의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한 전시를 선보여왔다. 2023년 새롭게 선정된 6명(팀)의 작가들과 함께 백남준아트센터는 미술관이 백남준의 실험 정신과 현대예술이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3.0》을 이어간다.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3.0 그레이코드, 지인: WIW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