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은 편지, 악보, 에세이, 기획안, 보고서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여러 언어로 남겼다. 그 중 1974년 작성한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 21세기까지는 고작 26년 밖에 남지 않았다」라는 비장한 제목의 보고서는 아티스트의 것이라기 보다는 정책가의 것에 가깝다. 보고서는 당찬 포부에 그치지 않고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낱낱이 담고 있다. 1930년대 미국이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경제 부흥을 이루었듯, 이제는 ‘전자초고속도로’ 구축으로 아이디어를 실시간 전송해야 한다는 시급성을 강조하며 오늘날 실현된 인터넷의 비전을 제시한다. 또한, “정신 오염은 대기 오염만큼이나 심각하다”는 우려와 함께, 기술 전문가, 권력 복합체가 미디어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한다.
백남준은 실제로 ‘컨설턴트’라는 직함을 가졌다. 그는 뉴욕 활동 시기에 미국 록펠러재단 ‘텔레비전/비디오/필름’ 부문 지원금으로 작업을 진척시키는 한편, 공식/비공식 자문역으로서 1960년대 중반부터 약 20년에 걸쳐 비디오 아트에 대한 지원 당위성과 발전 방향성을 주도적으로 제안했다. 이 시기에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방송국 텔레비전 채널에서 송출되거나, 학술적으로 논의되었고, 미술관에서 전시, 소장되며 확산되었다. 인류 문화역사와 보존을 위한 기록, 타문화에 대한 몰이해를 해결하고 배우는 도구로서의 비디오 교환, 세계를 연결하는 소통 체계로서의 전자초고속도로 구축, 다양성을 담보한 공영방송 콘텐츠의 지속 등 백남준의 제안은 예술을 매개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대담한 포부이자, 매우 구체적인 당장의 실행 방안이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는 제목 그대로 백남준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출발한다. 1968년에서 1979년 사이에 백남준이 미국에서 영어로 작성한 주요 보고서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된 교육」(1968),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1974), 「PBS 공영 방송이 실험 비디오를 지속하는 방법」(1979) 을 바탕으로 정책가 백남준을 살펴본다. 전시는 백남준의 보고서와 작품을 함께 보며 그를 새롭게 ‘발견’하기를 권하는 한편, 정부의 제도적 지원은 물론 민간 재단, 메세나 기금, 학교, 연구소, 미술관, 방송국의 지원과 협업이 그의 사회적 역할 실천에 도움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라는 익숙한 길에서 돌아나와 또 다른 백남준을 맞닥뜨리는 것, 정책가 백남준의 구상과 실현을 가능하게 했던 예술 생태계와 제도적 기반을 살피는 것이 이 전시의 목적이다. 1960년대 사회 전환기, 변화의 흐름에 주목한 미디어 컨설턴트 백남준을 들여다보는 일은 지금까지 백남준 연구에서 주목하지 못한 일련의 과제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전자예술 작업과 새로운 접점을 마련한다. 백남준의 보고서는 오늘날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이 나아가야 할 길에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지금, 또 한 번의 디지털 전환과 사회 변화의 한 가운데서 백남준의 미디어 컨설팅은 현재진행형이다.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