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사)
1. 작가님과 작품 활동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이번에 신작 〈평온의 섬〉(2020)을 선보인 함혜경이라고 합니다. 제 전작 대부분이 싱글채널 비디오인데, 좋아하는 형식입니다. 저는 단편적인 문장들을 메모해 놓은 뒤 그것들을 퍼즐처럼 맞춰나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거기에 다양한 장소에서 촬영된 이미지를 수집해 사용하죠. 서사 구조를 만들기 보다는 나열된 기록들을 임의로 선택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합니다. 주제나 일종의 분위기, 그리고 캐릭터를 가지고 작업하지만, 쭉 이어져 나가는 플롯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 작업 대부분은 사소하지만 마음을 움직인 사건들 그리고 영감을 주는 사람들에게서 파생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에 참여해 올해 마지막 작가로 대미를 장식하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작가들의 전시 일정이 변경 되거나 취소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작가로서는 준비한 작업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어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도 정해진 날짜에 오픈할 수 있을지, 거리 두기가 격상될 때마다 전시장을 닫게 되는 건 아닌지 마음이 많이 쓰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 전시 일정을 채울 수 있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3. 작가님은 꾸준하게 영상 매체를 활용한 비디오 작업을 이어오고 계시죠. 흔히 백남준 작가를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라고 부르잖아요. 영상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백남준 작가의 영향 아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백남준 작가와의 개인적인 혹은 예술적인 연관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백남준 작가는 이미 1970년대에 오늘날의 이야기는 비디오로 기록될 것이라고 예견하셨죠. 저에게 비디오라는 매체는 그러한 기록을 통해 시간이라는 개념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또 다른 매체로는 구현할 수 없는 시공간의 조합이 오직 비디오 속에서 가능하다는 데 큰 매력을 느낍니다. 이미 흘러간 시간을 다시 불러온다거나, 가보지 못한 장소들의 이미지를 조합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제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무엇보다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게 된 것에 선생님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4.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Vol. 9 《평온의 섬》에서 선보인 동명의 작품에 대한 간략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는 제 작업을 분석하는 재능이 없는 편인데. 흠, 이 작업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장면도 있고, 지나치게 주관적이라 공감하기 어려운 텍스트도 있을 겁니다. 저는 권태롭고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제 이야기 속 주인공을 이 세상 밖으로 데려가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욕망, 사랑, 시간, 장소에 부여된 현실의 의미를 지워가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이번 작업은 메인 스토리가 있고, 중간 중간 과거나 미래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구조를 생각했습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베티’라는 인물은 제 첫 작업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2003)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 이름입니다. 영상 후반부에 나온 스틸 이미지도 2006년 파리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일주일 전쯤 시내를 돌아다니며 자동카메라로 찍어두었던 사진을 스캔 받아 사용했습니다. 다른 어떤 작업보다도 실제의 제 과거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것들을 다 써버리고 나면 이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네요.
5. 백남준아트센터 전시 이후의 활동 계획을 소개해 주세요.
제 기준에서 좀 더 실험적인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영상이라는 매체를 너무 소극적으로 혹은 익숙한 방식으로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기도 하고요. 매번 명확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작업을 시작하는 편은 아니지만, 뭔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습니다. 이번 〈평온의 섬〉을 선보인 이후 한 지인으로부터 “이제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작업을 한번 해보는 건 어때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의미는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제가 시도해보려는 것과 닮아있는 코멘트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상의 움직임이나 관점, 리듬 같은 것들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고 싶어요. 사적 서사와 공적 서사를 보다 폭넓게 다루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6. 올 초 프로젝트 작가로 선정된 이후 백남준아트센터와 꾸준한 교류를 통해 신작을 제작하고 선보이셨는데, 프로젝트와 관련해 공유하고 싶으신 의견이나 에피소드가 있으시다면요?
하나의 전시를 열기까지는 보이는 것 보다 더 많은 양의 작업이 요구되고, 많은 계획들은 늘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기획자 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에게 있었던 기쁜 일과 슬픈 일을 공유하며 전시가 종료되기까지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일종의 야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는 캐릭터에는 관심이 없지만, 종종 제 비디오 속 인물들이 다른 사람들의 작업 속에 등장하는 자신만만한 캐릭터들에게 뒤쳐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제 작업은 주목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제가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을 조금 더 괜찮게 보려고 애쓰는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지나간 전시가 되었지만, 함께 해주신 기획자 분들과 관람객 분들에게 2020년이라는 잊지 못할 한 해를 보내는 동안 잠시나마 위안의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