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남준, <M200>, 1991, 한국렌탈주식회사 소장품
현대 도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뒤덮이며, 이미지와 소리의 정보가 끊임없이 흐르는 거대한 인터페이스처럼 존재한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이 빛은 단순한 신체 감각의 자극을 넘어, 비디오 이미지와 소리를 전달하고 처리하는 전자신호의 변환된 형태이기도 하다. 빛이 담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전달 속도는 비약적으로 증대되고,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수백만 개의 비디오는 빛과 함께 재생되어 우리 앞에 펼쳐진다. 이는 인간의 인지 가능한 범위를 넘어 전에 없던 새로운 차원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세계를 기억하고 인식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도시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인류의 사건을 더 이상 말이나 글이 아닌 비디오로 기록하게 될 것을 예견한, 백남준의 ‘비디오리(videory)*’를 떠올리게 한다. 백남준의 말처럼 오늘날 역사는 이미지나 비디오로 기록된다. 인류의 정보, 사건, 이야기를 담은 수백만 개의 비디오가 중첩하는 시공간 가운데, 우리는 더 이상 비디오를 단순히 감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비디오가 기록하고 생성한 인류의 역사가 축적된 시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전시 제목 《백남준의 도시: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는 백남준이 꿈꿨던, 비디오로 연결된 삶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는 아르튀르 랭보의 시 「영원」에서 가져온 표현으로, 백남준은 이 시구를 통해 비디오 특유의 비선형적 시간 감각을 시적으로 포착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 전시는 비디오가 만들어내는 시공간의 본질을 탐구했던 백남준의 사유를 출발점으로 삼아, 동시대 최첨단 기술이 만들어내는 미디어의 다층적 시공간을 탐색하는 동시대 작가들을 조명한다. 이들은 비디오가 재구성한 세계 안에서 비인과적으로 연결되고 동시에 발생하는 사건들로 얽혀있는 지금의 순간을 다시 바라보게 할 것이다.
* “역사(history)”라는 단어는 인간의 사건들이 구술되고 문자로 기록되면서 비로소 성립된 개념이다. 오늘날 역사는 이미지나 비디오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이미지리(imagery)’ 혹은 ‘비디오리(videory)’만 존재한다. — 백남준, 빙햄튼에서의 편지(1972)
백남준의 도시: 태양에 녹아드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