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3월, 뉴욕 현대미술관의 학예사 바바라 런던이 기획한 <비디오 관점들> 시리즈의 하나로 백남준은 「임의 접속 정보(Random Access Information)」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다. ‘임의 접속’ 즉 ‘랜덤 액세스’는, 마그네틱테이프의 재생 방식처럼 순차적으로 정보를 읽어내는 것과 달리, 컴퓨터에서처럼 원하는 위치의 정보를 즉각적으로 읽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이 강연에서 백남준은 서로의 면이 겹쳐지는 두 개의 둥근 원을 그리고, 한쪽에는 예술, 다른 한쪽에는 소통이라고 쓴다. 그리고 두 원이 겹치는 가운데 부분에 사과 씨앗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 당시 강연의 주제였고, 백남준의 꿈이라고 말한 이 씨앗은 무엇일까? 백남준은 이 씨앗을 비디오 아트가 가진 잠재성으로 보았다. 백남준은 인류 역사의 모든 시간 정보를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는 비디오에 임의 접속하는 것이 소통의 문제를 극복할 중요한 해결책이라고 믿으며, 이 씨앗을 움트게 하기 위해 무한하게 기록된 시간의 정보를 자르고 붙여서 비디오 아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공연이나 전시 관람객이 아닌 불특정한 범위의 확산이 가능한 텔레비전 시청자를 대상으로 방송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비디오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소통의 가장 큰 문제는 단절되는 것이다. 만날 수 없고 서로를 알 수 없으면 오해와 편견이 쌓여 통하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과 소통이 만나면 서로의 매개체가 되어 그 실행 방식이 다양해지고, 서로에게 강력한 도구가 되어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 이르게 한다. 시간을 재조합하여 편집하는 비디오 작업이 시공간의 구속을 벗어나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연결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 낼 것을 백남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백남준은 1963년 그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랜덤 액세스>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작품은 관객이 마그네틱테이프의 원하는 부분을 긁어 녹음된 음악 정보를 들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 관객의 참여로 소리를 만들 수 있었다. 비단 비디오 아트뿐만 아니라 예술과 소통이 서로 교차하여 일어날 수 있는 일의 무한한 잠재성을 품고 있는 이 씨앗 안에는 그가 예술을 시작한 이후 멈추지 않고 거듭해 온 전위적인 예술들이 그 자양분으로 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시공간의 한계 없이 언제든지 접속하여 누구든지 만날 수 있고, 원하면 어떤 관계든 만들고, 발견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백남준의 사과 씨앗을 새롭게 싹 틔워야 할 때이다.
사과 씨앗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