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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백남준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그의 아흔 번째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열어 축하했을 것이다. 아흔 살의 백남준은 팬데믹과 메타버스의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과 기술의 방향성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해주었을까? 우리는 아흔 살의 그가 어떤 생각을 할지 알 수 없지만 마흔다섯 살 생일을 앞두었던 백남준의 생생한 고민을 돌이켜 들을 수는 있다. 당시 백남준은 자신의 예술적 성향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돌아보며 그 근본을 깊이 탐구하고 있었다. 백남준은 이 과정을 ‘아방가르드의 고고학’이라고 불렀다.
백남준은 유년기에 피아노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쇤베르크가 가장 전위적인 작곡자다”라는 말에 즉시 마음이 끌렸다. 마치 영혼의 깊숙한 바닥으로부터 무언가가 울려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위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일생의 방향을 정한 것이다. 백남준은 그가 아방가르드에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이 자신의 유전자로부터 유래한 것, 즉 자신의 본래의 성격에 아로새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백남준은 우랄 알타이 사냥꾼들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언제나 멀리 떠나 새로운 지평선을 바라보았듯이, 아방가르디즘이 자신의 삶을 항상 새로운 예술로 잡아 끄는 근원이었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왜 백남준이 그토록 멀리 보는 기계, 즉 텔레비전(tele-vision)에 끌렸었는지, 그리고 왜 항상 새로운 매체를 찾아 작업을 했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백남준이 마흔다섯 살이 되던 1978년에 그의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그는 생계 때문에 친구였던 요셉 보이스의 뒤를 이어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승낙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교수직을 얻기 한 해 전인 1977년에 《도큐멘타 6 위성 텔레캐스트》를 통해 위성을 이용한 비디오아트의 가능성을 시도해보았지만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기회는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백남준은 독일과 뉴욕을 묵묵히 오가며 작업을 계속했고 1982년의 휘트니 미술관의 회고전을 거쳐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발표하며 다시 새로운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가 위성을 통해 멀리 여행을 떠나고자 했던 새로운 지평선은 우주였다.
예술과 삶을 통합하며 새로움을 추구했던 아방가르드는 현대 예술의 청년기이기도 하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이 없는 아흔 번째 생일잔치를 준비하며 아방가르드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방가르드를 그저 지나간 미술사의 한 페이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을 지탱하고 숨 쉬게 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아방가르드 백남준을 생각하며 고른 열 장면이 있다. 우리의 기억은 2000년 레이저 작품 앞에 있는 백남준에서 시작하여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설치 중인 백남준,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지휘하던 백남준, 1960년대의 청년 백남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이 인상적인 열 개의 장면 각각에서 백남준의 말과 그의 웃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백남준의 아방가르드 생애의 열 장면을 지나 우리의 현재로 돌아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요하는 팬데믹과 메타버스 시대에 백남준이라면 어떻게 당당하게 새로운 길을 냈을까를 질문하려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