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에>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이 악보는 중세시대 기보법인 사각형 네우마(neumes)로 된 그레고리오 성가이다. 네우마 기보는 사각형 기호를 사용하여 사선지에 멜로디의 높낮이를 표시하는데, 가사의 한 음절에 여러 음이 모여 있기도 해서 가락의 방향과 움직임만을 나타낸다. 절대적인 음을 명시적으로 지정하지는 않으므로 어느 음에서 시작할 지는 부르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임의로 시작점을 잡을 수 있고 음가도 정할 수 있었던 중세 악보의 구조와 형태에서 백남준은 자신이 1963년에 구현했던 ‘랜덤 액세스 음악’의 원리를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랜덤 액세스> 시리즈 중에는 릴로부터 풀어낸 마그네틱테이프를 조각조각 벽에 붙인 후, 관객이 재생 장치의 헤드로 원하는 테이프 부분을 직접 긁어 소리를 내게 한 작품이 있다. 백남준은 15세기 성가 악보에 사각형으로 자른 마그네틱테이프 열 조각을 원래의 사각형 음표 위에 군데군데 붙이고 <랜덤 액세스> 라는 제목을 다시 붙임으로써 이 개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