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이 그의 기술적 동지 슈야 아베와 주고 받은 서신들을 모아 『백-아베 서신집』을 출간하였다. 일본어로 작성된 서신의 원본 이미지와 함께 한영 번역 원고가 수록된 이번 서신집은 백남준아트센터, 도쿄도 현대미술관, 스미스소니언 백남준 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는 서신 총 97통을 수록하고 있다. 이번 서신집은 1963년부터 2005년까지 주고받은 엽서, 연하장, 편지, 항공우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백남준과 슈야 아베는 1963년 처음 만난 후, 영상합성을 가능하게 하는 기계적 장치를 개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쏟아 부었다. 흑백 카메라를 연결하여 컬러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을 시작으로, 아베와 함께 수작업으로 제작한 영상 합성기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1969/1972)의 제작까지 둘의 기술 협업은 진지하고 세밀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협업 내용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 그리고 유머를 서신 곳곳에서 볼 수 있다. 2005년 백남준은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노트를 아베에게 보낸다. ‘평생 한 번 있을 만남’을 뜻하는 이 문구는 아베가 백남준에게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인연이자 동지였음을 보여준다.
『백-아베 서신집』은 원 서신의 의도를 최대한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편집⋅번역했으며, 이 과정에서 표준어보다 원문의 어감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당시의 언어들은 그대로 살렸다. 원문 번역은 백남준의 필체와 당시의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백남준의 유치원 친구 이경희 선생과 미디어 아트 전문가 마정연 박사가 담당했고, 확인이 어려운 내용은 슈야 아베 선생과 직접 상의하여 내용을 정리했다.
전문가 서평
홍성욱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교수)
최근 역사학계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는 방법론 중에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transnational history)’라는 것이 있다. 역사를 연구할 때 국경이라는 경계에 갇히지 말고, 사람, 아이디어, 물건 등이 국경을 넘나들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동적인 과정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이번에 출판된 『백-아베 서신집』에 실린 편지들은 주로 미국에 거주했던 백남준과 일본의 슈야 아베 사이에 아이디어, 기계, 테크닉, 전략, 사람이 오가면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형성해 냈던 과정을 오롯이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역사는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의 모범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둘이 주고받은 첫 “편지”는 백남준에게 아베를 소개한 우치다 히데오의 명함이었다. 1963년 도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다른 종이가 없던 백남준이 자신의 주소를 명함 뒷면에 적어서 건네준 것이었다. 이후 백남준과 아베는 함께 ‘로봇’을 제작했고, 백남준은 1964년에 이 로봇을 가지고 뉴욕으로 건너갔다. 도쿄에서는 잘 작동했지만, 뉴욕에서 보니 기어와 제어용 리드 셀렉터가 빠지고, 7채널이 못쓰게 되고, 릴레이가 타고, 배터리가 약해졌다. 1964년 7월 4일의 편지는 이걸 수리하는 데 “악몽과 같은 일주일”이 걸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백남준은 자신이 필요한 부품들, 전자기기들을 아베에게 요구하고, 이런 부품들은 동경에서 구매되거나 조립된 뒤에 뉴욕으로 부쳐졌다. 백남준은 틈틈이 부품값과 수고비를 송금했고, 일부는 일본에 거주하는 자신의 형으로부터 받으라고 했음을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것도 있다. 아마도 아베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백남준은 오랫동안 지구본을 알아봤고, 결국 하나를 사서 아베에게 보냈다. 그런데 당시 이런 물건들은 태평양을 오가면서 파손되는 경우가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남준이 보낸 지구본도 일본에서 열어보니 파손되었고, 일본에서 부친 비디오 카메라가 대파된 경우도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1964년 11월 2일 편지에서 백남준은 “Transport의 문제가 있으니까 다시 한번 각 세부의 신뢰성, 내진 안전성은 100%를 기해 주시기를 부탁”한다고 적고 있다. 정말 중요한 기계는 사람이 오갈 때 인편으로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1964년 백남준과 아베는 일종의 비디오테이프리코더를 개발해서 판매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이는 소니와 같은 대기업과의 경쟁이었는데, 결국 젊은 예술가-엔지니어의 협동연구는 소니를 이기지 못했다. 1965년 1월만 해도 백남준은 더 투자를 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었지만, 2월의 편지는 “대기업이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리가 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다”고 적고 있다. 날짜를 알 수 없는 한 편지에는 이것이 “4년간의 비밀작전”이었고, 마지막에 한 발 져서 약이 오른다는 심정이 적혀 있다.
이 서신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백남준의 비디오 신디사이저가 구체화된 과정과 관련된 것이다. 우선 1966년 2월 1일에 백남준이 아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지의 중첩 실험을 하고 싶다는 얘기가 언급되면서, 아베의 견해를 묻는 구절이 있다. 1969년에 백남준의 아이디어는 구체화되고, 7개의 카메라(비디오)를 이용해서 이 이미지들에 색깔을 입해서 이를 합성하는 아이디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해 가을에 WGBH 방송국의 후원을 받은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베와 함께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만들어서 미국으로 가져왔고, 아베는 1970년 여름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다시 백남준을 도와 이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첫 방송을 제작하는 일을 함께 진행했다. 이 무렵, 백남준은 비디오 신디사이저의 7개의 카메라를 가리켜서 “무지개의 7색”이라고 했는데, 이후 편지에서는 아예 이 비디오 합성기를 “무지개”로 표시하기도 했다. 1970년 2월경에 쓰인 편지에는 “무지개가 잘되면 나중에 크게 벌게 됩니다” “무지개와 적외선 카메라만 부탁” “무지개가 일등(가장 중요)”이라는 언급이 있다.
백남준은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의사, 아베」라는 글(1991)에서 아베의 독창적이며 천재적인 사고와 그의 성품을 높게 평가했다. 백남준은 아베가 없었다면 비디오 신디사이저는 발명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적기도 했다. 반면에 아베는 백남준의 천재성은 자신과 같은 범인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고, 자신과 백남준의 협력은 모두 백남준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축소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협력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예전에 백남준이 아베에게 보낸 편지의 손글씨가 해독이 안 돼서 일본 학생에게 이 편지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편지를 가지고 며칠 끙끙대던 일본 학생이 자기도 해독이 잘 안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학생은 이 편지를 일본에 있는 한 대학교수에게 보여줬는데, 그 대학교수도 이를 잘 읽지 못했다고 내게 전해 줬다. 그 교수는 ‘아마 이 편지는 슈야 아베 선생만이 읽을 것이다’는 얘기도 덧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독하기 힘든 백남준의 편지들이 이제 한글과 영어로 번역되어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서신집은 백남준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이 결실을 맺게 해 준 백남준아트센터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