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사)
1. 작가님과 작품 활동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 주세요.
무진형제는 정무진, 정효영, 정영돈이 함께 작업하는 시각예술 작가그룹입니다.
2.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여름으로 가는 문〉의 공간 설치는 영상 속 내용을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주제 안에서 어우러집니다. 영상, 조형, 공간구성 등 모든 요소들을 고려해 설치해야 합니다. 폐허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목재로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철망과 세라픽스로 채운 뒤 타일 공사까지 하다 보니 거의 공간 리모델링 수준의 공사에 가까운 설치를 했었습니다. 때문에 〈여름으로 가는 문〉은 저희에게 항상 기억에 남는 작업입니다. 단순히 몸이 힘든 것보다 매 전시 때마다 주어진 공간에서 어떻게 〈여름으로 가는 문〉에 담긴 요소들을 되살릴지 고민해야 하거든요. 그럼에도 메자닌만큼 풀기 어려운 공간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길고 사방이 트여 모든 장소와 접속이 가능한 공간에서 폐허의 공간을 만들어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설치할 때 굉장히 힘들어도 하루하루 어려운 문제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3. 작가님의 작품들은 주변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우리 삶의 새롭고 낯선 지점을 조명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 혹은 일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예술적 의미를 포착하고 이를 영상 언어로 발전시켜 나가고 계시는데요.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의 기획자로서 이러한 점들이 일상에서 예술적 이야기를 다채롭게 끌어내고 또 여러 동료들과 협업하여 함께 작품을 했던 백남준 작가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백남준 작가와의 개인적인 혹은 예술적인 연관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두드러지게 연관된 지점은 잘 모르겠습니다. 백남준 작가의 작업을 볼 때마다 유독 와 닿는 지점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요. 대표적인 작업이 〈TV 부처〉입니다. 저희는 백남준의 작업에서 늘 그의 과거를 봅니다. 단순히 과거의 객관화된 시간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체화되어 있는 과거의 어느 부분에 대해서 말이죠. 그의 체화된 과거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정된 것으로 머무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그의 작업에서 제시되어 관객들과 나누는 선문답이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오래 전 옛 선사 부처를 마른 똥막대기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남준 작가는 불상과 TV를 함께 놓아 관객들에게 불교의 영원한 난제인 ‘부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동시대 인간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 것 같습니다. 물론 백남준은 종교로써의 불교가 아니라 그야말로 불교 그 자체를 자기 사유의 도구로 삼았던 작가였던 것 같습니다. 불교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가장 중요하잖아요. 지금 무지한 나의 자리가 곧 깨달음의 현장이기도 하니까요. 백남준 작가는 이걸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대상으로서의 부처를 보라는 게 아니라 티비라는 우리에게로 온 새로운 시대적 조건 속에서 그 마른 똥막대기와도 같은 부처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에 대한 화두를 던진 거죠. 우리 시대에 어떤 특정한 기술이 출현했을 때 우리의 담론과 사유는 그 기술의 옳고 그름, 인간과 비인간 등, 양단의 문제로만 쏠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백남준은 오히려 부처상마저 TV를 통해 보고 있는 우리에게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적 조건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사유하고 있는지, 즉 어떤 앎과 무지로 둘러싸여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무진형제에게 백남준의 작업은 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4.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에서 보여주셨던 작품 〈여름으로 가는 문〉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여름으로 가는 문〉은 키가 작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며, 매일 같이 4000개의 줄넘기를 하던 소년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소년의 몸짓을 영상으로 담았고, 줄을 넘는 소년의 모습은 늙은 곤충과 대비되고, 또 다른 영상인 여름날 지구의 대기 흐름에 빗대어 표현되었습니다. 다소 모순되고 삐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도 소년과 세계 모두 멈추지 않고 각자의 생장수장의 시기를 보내고 있죠. 메자닌 끝에 설치된 영상을 보려면 일단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요. 무진형제는 난간에 투명한 아크릴로 만들어진 소년의 모순된 말 조각을 붙여두었습니다. 소년의 말과 그의 행위가 메자닌의 양 끝에서 위치해 있고, 그 사이에 기다란 폐허가 놓여 있습니다. 소년을 둘러싼 규격화된 세계이자 어른들의 고정된 앎과 언어의 세계입니다. 무진형제는 폐허의 세계를 부서지고 깨어진 타일과 그 타일이 벗겨진 어둡고 앙상한 뼈대만 남은 공간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공간의 빛은 바닥에 설치된 7개의 빛나는 균열 이미지에서 새어나옵니다. 소년의 말을 더듬더듬 만지고, 울퉁불퉁하고 어두운 폐허의 공간을 지나 소년의 영상을 본 관객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이 작업은 모든 부분이 이렇게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항상 소년의 말과 폐허의 세계가 함께 설치됩니다.
5. 그 후로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그간 여러 전시에 참여하셨는데요.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 이후 작품 활동과 향후 계획을 소개해 주세요.
소년과 작업한 후 얼마 안 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영상은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한 마을에서만 살아온 노인의 하루를 담는 영상 볼륨1, 그리고 삼대의 거주 이야기를 가상의 이미지와 구를 파는 장면과 함께 들려준 볼륨2로 구성됩니다. 이 영상으로 미술관 전시와 다양한 영화제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2019년에 한네프켄 재단과 북서울시립미술관이 주관한 한국 비디오아트 프로덕션 어워즈를 수상하여 〈오비탈 스퀘어스(Orbital Squares)〉 신작을 제작하고 전시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첨단 기술을 이용해 다양한 삶의 궤도를 획일적인 방식으로 포섭하고 있는 자본 시스템 하의 인간을 담았습니다. 향후 계획은 현재 구상 중인 작업들의 제작으로 채워질 것 같습니다.
6. 랜덤 액세스 프로젝트와 관련해 공유하고 싶으신 의견이나 에피소드가 있으시다면요?
무진형제 각자가 평소에 사운드에 예민한 편이라 반복된 소리나 음악을 잘 못 견뎌합니다. 딱 한번 예외가 있었는데요. 메자닌 공간 바로 아래에 백남준 작가의 〈TV 정원〉이 있어 설치 기간 내내 하루 종일 그 영상의 사운드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상하게도 단 한 번도 거슬린 적이 없었습니다. 폐허의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며칠에 걸쳐서 메자닌 공간 전체에 세라픽스를 바르는 작업을 했었는데요. 허리가 너무 아파 잠시 쉬기 위해 몸을 펴면 딱 보이는 게 〈TV 정원〉이었습니다. 저희는 쉴 때마다 그 작품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저희에게 정원이 되어주었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설치를 떠올릴 때마다 〈TV 정원〉이 함께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