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아트센터의 사진컬렉션] 사진 속 시간들, 멈춤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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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진 속 시간들, 멈춤의 힘
백남준아트센터의 사진 컬렉션은 플럭서스 운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던 백남준의 역할, 그리고 미디어 아트라는 미답의 터를 닦은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 담긴 예술적 개념들을 읽어낼 수 있도록 돕는다. 그 밖에도 이러한 백남준의 예술 정신이 세월이 흐르면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볼 수 있는 사진들도 있어서 컬렉션의 시간 층위는 한결 깊어진다.

만프레드 몬트베가 찍은 《음악의 전시》사진 중에는 [사진 1]처럼 바이올린, 숟가락, 장난감 자동차축 등을 줄에 매달아 바닥에 끌면서 전시장 여기저기를 천천히 걸어 다니는 백남준의 퍼포먼스 모습이 있다. <걸음을 위한 선>이다. 백남준은 이미 1961년 쾰른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끌고 걸어 다니는 퍼포먼스를 했었고 이때는 사슬로 묶인 낡은 샌들, 작은 종, 석조 두상 조각도 매달고 걸었다. 백남준은 이 퍼포먼스를 후에도 여러 차례 했고, 마지막이 된 1975년 제1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는 브루클린의 비행장이었던 플로이드 베넷 필드 공원에서 바이올린을 끌었다. [사진 2]는 피터 무어가 이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선(線)의 선(禪)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매달린 물체가 끌리며 내는 소리, 무심하게 끌고 걸어가는 여유롭지만 단단한 백남준의 뒷모습, 그리고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같은 퍼포먼스를 수 차례 반복하되 변주해오면서 축적된 시간까지. 사진 한 장의 울림이 그 어떤 오케스트라의 연주보다 풍성하게 느껴진다.

사진1. 백남준, <걸음을 위한 선>, 1963, 40.2×30.4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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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만프레드 몬트베

사진2. 백남준, <현이 있는 바이올린>, 1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1975, 59.5x40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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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피터 무어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선(禪)’이라는 제목은 텔레비전과도 결합하였는데, 화면에 선 하나만 나타나는 고장 난 텔레비전을 〈TV를 위한 선〉이라 불렀다. 푸른 빛이 도는 회색 화면을 흰 색의 수직선 하나가 마치 깨달음의 섬광처럼 베고 지나가는 이 텔레비전을 동료인 요셉 보이스, 귄터 우커와 함께 명상하듯 오랜 시간 본 적도 있다고 백남준은 회고한 바 있다. 백남준의 ‘선’은 영화에도 접목되기에 이른다. 1965년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뉴시네마 페스티벌》에서 상영되고 공연된 <필름을 위한 선>이다. 시네마테크의 디렉터였던 요나스 메커스가 주도하여 기획한 이 페스티벌은 아방가르드 퍼포먼스와 무빙 이미지를 결합한 확장된 시네마 계열의 작업들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필름을 위한 선>은 비어 있는 낡은 필름을 영사기에 돌려 필름 표면의 스크래치와 먼지 입자들이 스크린에 비춰지도록 한다. 필름을 비워둠으로써 우연히 개입한 물리적 흔적들이 이미지가 되어 펼쳐지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사진 3]에서 보듯 백남준은 필름이 돌아가는 영사기와 화면 사이를 가로막으면서 자신의 실루엣과 움직임에 따라 화면의 내용이 새롭게 구성되는 퍼포먼스까지 직접 시연했다. <필름을 위한 선>도 어떤 대상을 촬영하여 재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매체 자체의 물질성을 드러내면서 내용과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매체 자체에 주목하게 한다.

사진3. 백남준, <필름을 위한 선>, 뉴시네마 페스티벌, 1964, 40×59.5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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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피터 무어

사진4. <자석 TV 와 함께 있는 백남준>, 뉴욕 카날가 스튜디오, 1965, 40×59.5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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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피터무어

매체에 대한 백남준의 기술적 연구도 계속되었다.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전시에서 흑백 텔레비전만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백남준은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자들과 접촉하면서 컬러 텔레비전에 대한 실험을 벌여 나갔다. 1965년에 만들어진 <자석 TV>는 이 연구의 결과다. CRT 모니터의 브라운관 주변에 감겨있는 코일은 일종의 전자석으로 전자를 빠른 속도로 화면에 뿌려 준다. 이 모니터에 자석을 갖다 대면 전자의 흐름이 방해되면서 편향이 발생하여 RGB 컬러가 두드러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텔레비전 내부의 회로 조작에 집중했던 백남준이 텔레비전 외부에서 영상에 영향을 미치는 작용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실험 텔레비전 중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 바로 <자석 TV>이다. [사진 4]는 피터 무어가 찍은 것으로 뉴욕 카날가 359번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자석 TV>를 다루고 있는 백남준의 모습이다.

사진5. 백남준, <플럭서스 소나타 4>,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 1975, 40×59.5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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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피터 무어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제시된 비선형적 소리 만들기 실험은 1970년대 보다 적극적인 리믹스의 단계까지 전개된다. [사진 5]는 1975년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에서 열린 <플럭서스 소나타 4번> 퍼포먼스이다. 요나스 메카스의 시네마테크를 전신으로 하여 1970년 문을 연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는 얼마 안 있어 이전을 하게 되었고, 1973년 뉴욕 우스터스트리트 80번지에 건축 중이던 새 부지에서 백남준은 <플럭서스 소나타 1번>을 시작으로 이 소나타 시리즈를 몇 차례 수행했다. <플럭서스 소나타 4번>은 여러 대의 턴테이블을 사용한다. 백남준이 LP 음반 하나를 재생한 후 팔짱을 끼고 앉아 유심히 듣다가 다른 턴테이블로 가서는 또 다른 음반을 올려놓고 레버를 작동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재생되고 있는 두 판 사이를 오가며 손으로 판의 회전을 갑자기 멈췄다가 다시 돌리는 행동을 반복한다. 음반의 재생에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퍼포먼스로서 오늘날 디제잉을 연상케 하는 액션이다.

1992년 「누가 요나스 메카스를 두려워하는가」라는 글에서 백남준은 바로 자신이라고 털어 놓는다. 누구든 좋은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고 누구든 그 아이디어를 실행할 수는 있겠지만 메카스처럼 기약 없고 보상 없는 인내심으로 무려 40여 년간 자신의 삶을 녹화하여 마침내 10시간짜리 싱글 프레임 비디오로 담아내는 일은 실로 존경스럽다는 것이다. 이처럼 백남준은 동료 예술가들의 훌륭함을 칭송하고 경의를 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을 준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는 일에도 활수였다. 그 표현의 방식은 백남준 특유의 유머와 수사가 곁들여지는데, 그가 타인과 함께 함의 기쁨과 가치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했었는지를 느끼게 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사진6. <장 피에르 빌헬름과 샬럿 무어먼, 장 피에르 빌헬름의 은퇴식 해프닝>, 뒤셀도르프 요셉 보이스의 집, 1967, 20.3×25.4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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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만프레드 레베

일례로 백남준은 1967년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장 피에르 빌헬름이 예술계에 작별을 고한 일을 꼽았다. “이미 50대 나이로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자각한 그는 나와 샬럿이 함께 기거하던 보이스의 집으로 사진작가 만프레드 레베를 동반하고 찾아왔다. 그는 대화를 나누던 중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미술계에서 은퇴할 것이라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 장면은 레베 박사가 찍은 사진으로 남아 있다. 빌헬름이 돌아가고 나서 보이스, 샬럿과 나는 웃으면서 “저 늙은이가 왜 이렇게 유치한 연극을 해야 했을까?”라며 놀렸는데 그는 이듬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1986) [사진 6]은 뒤셀도르프 요셉 보이스의 집에서 1967년 있었던 그날의 해프닝을 찍은 것이다.

사진7. 백남준, <장 피에르 빌헬름에게 보내는 경의>, 1978, 20.3×25.4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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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만프레드 레베

사진8. 백남준, <장 피에르 빌헬름에게 보내는 경의>, 1978, 20.3×25.4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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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만프레드 레베

사진9. 백남준, <장 피에르 빌헬름에게 보내는 경의>, 1978, 20.3×25.4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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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만프레드 레베

장 피에르 빌헬름 없이 플럭서스는 존재할 수 없었으며 자신의 생애에도 세 번이나 전환점을 마련해준 인물인 그에게 백남준은 매우 고마워했다. 1959년 당시 25살이던 백남준이 자신의 첫 곡인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를 발표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손을 내민 사람이 바로 빌헬름이었다. 그가 운영하던 갤러리 22에서 백남준은 데뷔 콘서트를 열게 되었고 당시 독일 예술계의 스타메이커였던 빌헬름 덕에 신진은 물론 많은 중진 작가들이 참석함으로써 백남준의 예술적 교류가 확장될 수 있었다. 빌헬름은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가 성사되도록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백남준의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1968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년 후 백남준은 <장 피에르 빌헬름에게 보내는 경의>라는 제목으로 자신만의 추모 퍼포먼스를 벌였다. 장소는 바로 갤러리 22가 위치했던 뒤셀도르프 카이저스트라세 22번지이다. 걷고 뛰고 웃고 하품하고 행인들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고. [사진 7, 8, 9]에서 보듯 백남준은 평범해 보이는 행동들을 하면서 이를 만프레드 레베에게 사진으로 찍어 달라고 청했다. 데뷔한 지 20여 년이 흐른 후 백남준은 자신을 비롯해 플럭서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친구를 추모했다, 일상의 몸짓으로, 가장 플럭서스다운 몸짓으로.

사진10. <생상스 테마 변주곡을 공연하고 있는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 제3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1965, 59.4×43.2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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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피터무어

사진11.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를 착용하고 있는 샬럿 무어먼과 백남준>, 뉴욕, 1969, 49.3×49.5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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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피터 무어

“1991년 봄. 그녀의 마지막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눈부셨다. 그녀가 쥔 활은 펜싱 챔피언이 휘두르는 검보다도 빠르게 움직였다. 첼로에서 푸른 불꽃이 튕겨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때 내 머리에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죽어가는 새의 마지막 노래가 가장 아름답다는 중국 속담과 죽음의 침상에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기사가 들려주는 마지막 충고가 지닌 순수함이었다.”(1992) 잘 알려져 있듯 샬럿 무어먼은 1964년 백남준을 처음 만난 이래 많은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백남준의 과감한 퍼포먼스 기획에 기꺼이 응했던 오랜 동료이자 협업자였다. [사진 10]은 1965년 제3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백남준과 무어먼이 <생상스 테마 변주곡>을 공연하는 모습이다. 투명한 셀로판 가운을 입은 무어먼이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 첫 몇 마디를 연주하다가 돌연 첼로를 내려놓고 물이 담긴 커다란 드럼통으로 걸어간다. 사다리를 타고 통에 올라가 그 끝에 잠시 걸터앉아 있다가 이내 통 안의 물로 뛰어든다. 그리고 흠뻑 젖은 상태에서 첼로로 다시 돌아와 곡의 나머지 부분을 연주하는 것이다. 사진 앞쪽에서 드럼통을 잡고 있는 백남준은 무어먼이 통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과정을 도왔다. 어느 글에서 백남준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날 듣고 싶은 음악이 너무도 많다면서, “데이비드 튜더가 연주한 존 케이지의 <겨울 음악>, 혹은 베토벤의 <봄 소나타> 2악장, 혹은 샬럿 무어먼이 연주한 생상스의 <백조>가 되지 않을까”라고 말한 바 있다.(1992)

백남준은 샬럿 무어먼을 위해 곡을 만들 뿐만 아니라 일종의 조각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도 제작하였다. 그 중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는 두 개의 플렉시글라스 상자 안에 각각 작은 텔레비전을 넣고, 투명 테이프로 상체에 부착하게 되어 있는 작품이다. [사진 11]은 1969년 뉴욕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에서 열린 그룹전 《창조적 매체로서의 TV》에서 무어먼이 이 를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TV 화면에서는 실시간으로 텔레비전 방송이 나오기도 했고, 폐쇄회로 카메라에 비친 관객들의 모습이나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의 영상이 나오기도 했다. 무어먼이 연주하는 첼로 음이 그녀가 몸에 두른 화면에 나타나는 영상을 재생하고 변조시켰다. 또한 손목에 자석을 부착해서 화면을 일그러뜨리기도 하고, 마이크를 이용해서 첼로의 소리를 모아 시각적인 시그널로 변형하여 화면을 조정하기도 하였다. 무어먼은 《창조적 매체로서의 TV》 전시 오프닝에서 5시간, 그리고 전시 기간 내내 매일 2시간씩 이 퍼포먼스를 수행하였다. 백남준이 기술의 인간화와 상상력에 대해 쓴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라는 글은 이 전시의 팸플릿에 실렸다

사진12. <타운 홀에서 즉흥 공연을 벌이고 있는 백남준>, 뉴욕, 1968, 40.4×59.8cm, 흑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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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피터 무어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의 협업을 가장 극적이고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한 것은 1967년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공연이다. 무어먼이 옷을 하나씩 벗으며 연주하다가 상반신까지 노출한 2악장 연주 중 경찰에 연행된 사건이다. 음악에서의 성적 금기와 표현의 자유에 관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지만 무어먼은 이로 인해 재판에 처해졌다. 소요되는 변호사 비용 등의 기금 마련을 위해 백남준과 무어먼은 1968년 6월 10일 뉴욕 타운홀에서 《혼합매체 오페라》 콘서트를 열었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연주되지 못했던 아리아 3번과 4번, <로버트 브리어 테마 변주곡>, <생상스 테마 변주곡> 등 백남준과 무어먼의 대표적 협업 레퍼토리가 무대에 올랐고, 백남준의 <심플>도 공연되었다. [사진 12]는 이 콘서트에서 상체를 탈의한 백남준이 손가락이 아닌 머리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두 사람 외에도 앨런 캐프로, 요나스 메커스, 제임스 테니, 에밋 윌리엄스 등이 찬조 출연했고 프로그램에는 무어먼의 유죄판결에 대해 반박하고 부당함을 주장하는 긴 글도 포함되었다.

사진 속 백남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전과 후에 어떤 동작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진 속 이 순간은 멈춰 있기에 오히려 우리가 백남준의 시간들 속으로, 백남준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열망을 부추긴다. 일분일초, 일거수일투족을 너무나 쉽고 신속하고 생생하게 기록하고 퍼뜨릴 수 있는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사진 한 장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백남준아트센터 컬렉션에는 만프레드 레베, 만프레드 몬트베, 피터 무어가 촬영한 사진들 외에도 한국 사진가 이은주가 1990년대에 찍은 백남준의 뉴욕 작업실,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신세를 지던 휠체어 사진도 포함되어 있다. 백남준과 같은 시대를 산 이들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본 백남준은 자유롭고 여유로운 태도를 지녔지만 자신의 치열한 연구와 작업과 실험을 극한까지 몰고 가기를 망설이지 않았던 예술가, “보잘것없는 우리 삶에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으로 얻을 수 있는 신비로움”을 믿었던 예술가다.(1984)

글쓴이 : 김성은 / 미술관과 현대미술 이론, 문화인류학을 연구하는 기획자이다. 미디어 아트에 있어 사물과 신체의 작용, 지식 수행의 장으로서 미술관의 감각적 차원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며 미술관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일했고, 현재는 리움에서 교육, 공공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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